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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책방

당신이 글을 써야 한다면? / 나는 어떻게 쓰는가 / 글로 먹고사는 13인의 글쓰기 노하우 / 카피라이터 손수진 /

by 디자이너 jay 2017. 5. 8.

WHY THIS BOOK


글로 먹고사는 13인의 글쓰기 노하우.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13명 작가의 글쓰기 노하우를 집약시킨 책입니다. 

김영진 영화평론가, 안수찬 기자, 유희경 시인, 정인진 변호사, 손수진 카피라이터, 김중미 동화작가로부터 직업적 글쓰기의 핵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중 카피라이터 손수진씨의 글을 옮겨봤습니다.


BOX IN BOOK


나는 어떻게 쓰는가

카피라이터 손수진 카피를 어떻게 쓰느냐니. 질문을 받고 나서 한참을 생각하고도 멍한 정신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얗게 뜬 워 드 문서에 커서만 깜빡깜빡. 카피라이터로 밥 벌어 먹고 산지가 근 십 년째인데, 카피를 어떻게 쓰는 지에 대해 좀처럼 한 글자도 토해내질 못하겠다. 그리고 이어지는 반성. 그 동안 도대체 나는 어떻게 카피를 쓰고 있었던 거지? 광고주의 채찍질과 경쟁 PT라는 부담감이 없으면 써지지 않는 것이었나? 아니, 그 전에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카피는 쓰는 게 맞기는 한 걸까?

카피는 과연 글인가

카피를 글의 한 종류로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카피만 놓고 보자면 대체적으로 문자 형태의 결과물이 나오는 걸 보아서 는 글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이 카피를 온전히 글로써 ‘읽는’ 경우는 거의 없는 걸 생각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물론 카피라이터는 글―이라기보다는 문장이나 단어―의 형태로 카피를 내놓는다. 하지만 그건 그저 광 고가 만들어지기 전의 중간단계일 뿐이다. 사람들이 광고 카피를 인식하는 것은 배경음악이나 효과음 등의 요소와 함께 성우의 목소리를 통해 ‘듣거나’, 그래픽으로 표현된 이미지를 통해 ‘보게’ 될 때이다. 그나마도 카피가 의미를 가진 메시 지일 때는 ‘글’이라 우길 수도 있겠지만, 카피가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의성어나 외마디 비명일 때, 이모티콘이나 낙서에 그칠 때도 우리는 카피를 글이라 할 수 있을까?

왜 이 문제를 이리도 따지고 드느냐 하면, 카피라이터가 갖고 있는 ‘카피’에 대한 입장 차이가 개개인의 창의성과 능력 이전에 어떤 카피를 쓰는가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카피는 스스로 완성된 하나의 글이나 창작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카피는 광고 크리에이티브의 일부이며, 광고의 목적과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기능을 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글을 쓰는 창작자’의 자의식만으로는 카피를 쓰기 힘들다. 카피라이터에게 자신만의 문체는 필요 없다. 자 신만의 생각과 발상이 필요할 뿐이다.

가장 상업적인, 너무나 상업적인

광고 카피라이터의 선조를 한반도에서만 국한시켜 따져본다면 아마도 저잣거리 엿장수와 약장수가 될 것이다. ‘둘이 먹 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울릉도 호박엿’부터 ‘애들은 가, 이거 한번 잡숴 봐~’까지, 이 얼마나 주옥같은가. 이 표현들이 세 대를 지나 관용적으로 굳어져서 그렇지 난생 처음 저잣거리에 나간 꼬마라고 생각해보자. 가위 짤랑 거리는 소리에―지 금으로 얘기하면 사운드 이펙트 되시겠다―고개를 돌려보니 엿판을 목에 건 엿장수가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울 릉도 호박엿’이라며 눈앞에 엿을 흔들어댄다. 세상에 옆집 영희가 먹다 죽어도 모를 만큼 정신 팔릴 맛이라니 얼마나 엄 청날까. 꼬마는 결국 엿장수의 ‘꼬임’에 넘어가 몰래 집에서 숟가락을 가져다가 엿이랑 바꿔먹고 볼기짝을 얻어맞는다는 뻔한 이야기다. 어디 이런 꼬임에 넘어가는 것이 애들뿐이랴. 약장수는 차력사를 등장시켜 시선을 끌더니―말하자면 원 빈, 현빈, 김태희, 전지현 같은 빅모델이다―‘애들은 가!’ 라고 일갈한다. 애들은 가. 이 얼마나 강렬하면서도 많은 함의를 담고 있는 카피인지. 우선 물건을 팔 대상을 ‘어른들’로 명확히 하는 동시에 아이들은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19금 뉘 앙스를 교묘하게 풍기는 고도의 전략적 언어다. 이 ‘애들은 가’에 버금가는 카피를 요즘 광고에서 찾아보면 아마도 ‘남자 한테 참 좋은데~ 어떻게 말할 방법이 없네’ 정도가 아닐까.

사람들의 쌈짓돈을 끌어내기 위해 장사치가 사람을 꼬드기던 말들은 산업화 시대를 통과하면서 카피라이터의 몫이 되 었다. 카피라이터는 기발한 문장, 강렬한 단어, 세련된 뉘앙스를 고민하기 이전에 카피를 쓸 때, ‘소비자의 지갑을 열 방 법’을 먼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카피는 태생부터가 상업적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아름답고 현란한 문장을 구사할 줄 알아도, 엄청나게 기발한 말장난을 생각해 냈다 해도, 그게 물건을 파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면 속물 같고 식상하고 아름답지 않고 유치하더라도 ‘팔릴 만한’ 방법을 다시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겠나. 결국 광고는 상업주의의 화려한 자식인 것을.

유혹의 대상을 먼저 알아야 한다

광고란 것이 지갑을 열기 위한 유혹이고, 카피는 그 유혹의 말이라면 카피를 잘 쓴다는 건 유혹을 잘 한다는 것일 터. 유 혹을 잘하려면? 너무 당연한 얘기라 쓰기도 민망하지만 유혹의 대상을 먼저 잘 알아야 한다. 이건 요즘 10대들은 무얼 좋아하고, 20대 사이에 무엇이 유행인가를 살피는 것은 물론이고 그 속에 담긴 함의와 생각,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나 동감 코드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통찰력이 필요하단 얘기다.

절대 쉽지 않은 이 ‘통찰’은 짝사랑하는 상대방의 마음에 내가 들어갈 방법을 고민하는 것과 거의 흡사하다. 좋아하는 사 람이 생기면 처음엔 그 사람이 무얼 좋아하는지, 어떤 걸 싫어하는지 관찰하지 않나. 저 사람은 된장찌개를 좋아하는구 나, 포크 음악 취향이구나 등등을 알게 되는 건 그나마 쉽다. 하지만 그저 그 사람이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같이 먹고, 음 악을 같이 듣는다고 해서 마음이 열리는 건 아니다. 그렇게 마음이 열린다면 세상에 짝사랑이 왜 있겠나. 마음을 여는 열쇠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나 버릇을 이해해줄 때, 혹은 이 사람이 ‘왜’ 이런 취향과 행태를 갖게 되었는지 유추하고 이해해줄 때 나온다. 만약 좋아하는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모성에 끌리기 때문이라는 이해까지 도달했 다면, 엄마와 연인의 일체화 전략으로 마음을 열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그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과 버릇을 일 깨워줌으로써 상대방은 나를 다시 보게 된다. 그걸 굳이 영어 많이 쓰며 젠 체하는 광고계에서는 ‘인사이트’라고 부른다.

이 인사이트를 발견하는 일, 어디 사람을 이해하고 통찰력을 발휘하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던가. 그렇기에 그저 열심히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마치 ‘국영수 중심으로 교과서를 열심히 공부했어요’ 하는 말처럼 공허하게 들리 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세대와 성별과 취향을 가리지 말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접하고 이야 기를 들어보는 것이 연습이다. 디시인사이드부터 경제포럼 게시판까지 다양한 글들을 읽고, 드라마, 영화, 소설, 만화 등등 요즘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이라면 좋든 싫든 일단 관찰하고 보는 것. 세상에 대한 넓은 관심이 생기면 서서히 그 이면이 보일지도 모른다. 오지랖 넓은 많은 사람들이 그 이면에 관한 보고서들을 쏟아내고, 서로들 분석하고 있으니 아마 보기 싫어도 보일 게다.

고급차를 팔고 싶으면 고급차를 사는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차를 성능과 디자인으로 고른다고 얘기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의 계급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숨어있다는 걸 읽어낸 사람이―카피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대한민 국 1%’니, ‘대한민국 CEO’니 ‘당신을 올려다봅니다’ 하는 카피를 쓸 수 있다. 이 카피가 정말로 대한민국의 상위 1%와 CEO들에게만 차를 팔기 위해 나왔겠는가. 그 과시적 욕구를 자극해 ‘자, 너도 이 차를 가지면 이렇게 될 수 있어’라는 유 혹의 목소리를 상징적으로 불러온 것이다.

모든 인사이트가 이렇게 내면의 심리적 욕망을 읽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 욕망 자체도 또 단순한 하나의 일면을 가지 고 있는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인사이트는 굉장히 다층적이다. 그 다층적 인사이트에서 지금 내가 팔려고 하는 것과 가 장 잘 어울리고, 다른 경쟁제품을 누르고 마음을 열 수 있게 하는 게 뭔지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유럽의 고 성들과 화려한 드레스를 통해 부동산의 가치를 얘기하던 아파트 광고들 사이에서 그와 정 반대 지점에서 진심을 얘기하던 광고 카피를 기억하는지. 그 광고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럼 사람들의 아파트에 대한 인사이트 가 부동산 가치보다 삶의 진심에 있었던 것 아니냐고? 글쎄, 결국 그 아파트가 가장 비싼 아파트가 되어버렸다는 아이 러니한 결과를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부동산을 오로지 계급과 돈으로만 바라보는 현실에 대한 반발심을 읽어낸 카 피의 한 수라고 볼 수 있겠다.

이처럼 인사이트는 정답처럼 정해진 것은 아니다. 술을 팔기 위해서 사람들이 술자리에 두고 있는 의미가 ‘친목’에 있다 는 걸 발견하는 것도 카피의 실마리이고, 또는 사람들이 소주를 마실 때 꼭 툭 쳐내서 덜어내거나 팔꿈치로 툭 치거나 하는 행위들을 하고 있다는 발견 또한 큰 실마리가 아니겠는가.

이런 전방위의 실마리들은 단기간에 공부한다고 잡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사람에 관한 학문인 인문학적 바탕이 있 으면 이야기는 더 깊어질 테고, 문화적인 이해가 높은 사람들은 트렌디한 감성을 잘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관 심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지속적으로 사람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가고, 계속 읽고 찾고 보고 이야기하고 듣고 또 생각하 는 수밖에.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사람들이 가진 인사이트의 팁을 얻기 위해 웹툰과 시사만화 같은 것들을 주의 깊게 공부하듯 찾아 보고 있다. 조석의 <마음의 소리>라든가 서나래의 <낢이 사는 이야기> 같은 웹툰은 정말이지 인사이트의 보고다.

이렇게 사람들을 관찰하고 공부하고 생각하며 소위 ‘내공’이라는 게 차곡차곡 쌓여 ‘이거다!’ 하는 유레카의 순간이 자주 찾아오게 된다면, 당신은 카피 쓰는 일이 훨씬 쉽겠지.